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 )
배경
고려말 조선초에는 성리학 도입의 시기여서 성리학에 대한 깊은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성종 대(15세기)에 이르러 성격덕의 기철학, 이언적의 리철학으로 성리학의 이론이 분화 체계화된다. 이를 바탕으로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이황, 정지운, 기대승, 이이, 등
Ⅰ. 서론
우리는 가끔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 등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아이를 구했다는 기사를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연예인이 음주 운전이나 간통죄로 고소되어 매스컴이 떠들썩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러한 양면적 인간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당혹감을
사단'과 '칠정'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인간의 심리 현상을 분석한 것은 이유가 있다. 더욱이 이러한 분석이 개인의 주관적 독단에 그치지 않고 논쟁을 통해 객관적 사고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은 특이하다.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 논쟁은 심성론과 이기론의 결합을 처음으로 시도하
퇴계선생은 높은 벼슬자리는 마다하고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원했다. 원래 이황은 원래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리는 것을 꺼려했으며 그의 형이 간신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재야로 물러가 숨을 굳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황이 살다 간 16세기
사단칠정론으로 대표되는 정밀한 이기심성론이 발달하게 됐다.
논쟁의 쟁점
이 논쟁의 쟁점은 1) 삶의 표준은 현상을 초월해 존재하는가, 내재해 존재하는가 하는 ‘삶의 표준의 지위’에 관한 문제, 그리고 2) 삶의 표준은 우리 삶에 작용을 하는 것인가, 작용을 못하는 것인가 하는 ‘삶의 표준의
Ⅰ. 고려 말 조선 초의 역사적 배경
고려사회에서 조선사회로의 왕조교체는 단순한 역성혁명으로서 왕씨왕조에서 이씨왕조로 전환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고려사회에서 조선사회로의 전환은 단순히 국가를 운영해가는 가장 최 정점에 있는 왕족의 교체만이 아니라 사회 운영의 주체세력의
조선 중·후기에 일련의 학자들과 다양한 사조들이 원주를 중심으로 한 근기(近畿)의 남한강 유역의 문화권에서 다양하게 발전되고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와 총체적인 접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달리 말하면 원주의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연
Ⅰ. 서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퇴계는 ‘존천리알인욕(存天理?人慾)을 통한 구인성성(求仁成聖)’이라는 자신의 지향처를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평생을 노력해 온 인물이다. 그의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위한 노력이나 정좌수련법 등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2) 사림(士林) - 정암(靜菴) 조광조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율곡의 개혁사상의 연원은 중국 선유(先儒)의 사상과 『주역(周易)』 등 유가의 주요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사상에 더욱 가까이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과 사상은 사림파의 등장과 그들의 사상, 특히 정암(靜菴
이황의 교육사상
주자의 사상을 발전시킨 ‘동방의 주자(朱子)’ 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정치에서 은퇴한 후 도산서원을 짓고 사색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노력.
사상의 중핵은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기